개인지식관리의 함정: 안다는 것과 실천한다는 것
개인지식관리(PKM)를 처음 시작하면 이론은 완벽해 보입니다. 그러나 정작 실천은 어렵고, 메모는 쌓이기만 하며 도구는 계속 바뀝니다. 이 글에서는 이론과 실천 사이의 간극, 즉 '이론의 함정'을 짚어보고 실천으로 옮기는 방법을 제안합니다.
Ordinary World: 이론은 완벽!
개인지식관리(PKM)을 처음 접하는 순간을 상상해봅니다. 아마 이런 모습일 겁니다.
회사에서 매일 쏟아지는 정보를 정리하고 싶습니다. 독서 모임에서 읽은 책 내용을 잊지 않고 싶습니다. 이번엔 제대로 관리해보자 다짐하며 제텔카스텐, Building a Second Brain(BASB) 같은 방법론을 찾아봅니다. 유튜브 영상을 보고, 블로그 글을 읽고, 옵시디언을 설치합니다. 영구메모 템플릿도 만듭니다.
"이제 시작하면 되겠지?" 자신감이 넘칩니다. 그런데 막상 매일 메모를 쓰려니 손이 멈춥니다. "연결을 왜 해야 하지?" 책에서 본 답은 알지만,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이론의 함정입니다.
Disturbance: 그런데 실제로는...
매일 메모 작성이 버겁습니다.
출근 전 "오늘은 점심 전에 꼭 정리하자" 다짐합니다. 하지만 회의가 연달아 이어지고, 갑자기 급한 업무가 들어옵니다. 저녁에 퇴근하면 "내일 아침에 하지 뭐" 미루게 됩니다. 주말에 몰아서 하려고 하면 쌓인 메모가 너무 많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이렇게 하는 게 맞나?'하는 의문만 쌓여갑니다.
만약 여러분도 임시메모(Fleeting Notes) 폴더에 처리 안 된 메모가 수십, 수백개 넘게 쌓여 있다면, 이건 여러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연결을 왜 해야 하나?" 체감이 안 됩니다.
책에서는 노트를 연결하면 새로운 통찰이 생긴다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막상 두 개의 메모를 앞에 두니 '이걸 왜 연결해야 하지?'라는 의문이 듭니다. 연결의 이유를 억지로 만들어내는 기분입니다. 이론으로는 이해했지만, 경험적으로 체득되지 않습니다.
도구만 늘어나고 워크플로우는 더 복잡해집니다.
처음엔 에버노트로 시작합니다. 그러다 노션이 좋다고 해서 옮깁니다. 다시 옵시디언이 제텔카스텐에 최적이라고 해서 또 옮깁니다. 매번 이번엔 제대로 될 거라고 기대하지만, 도구를 옮기는 작업에만 시간을 쏟습니다. 정작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은 점점 줄어듭니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도구를 바꿀 때마다 그동안 쌓아온 것들이 리셋됩니다. 에버노트에서 익숙해지기 시작한 검색 방법, 노션에서 겨우 만들어놓은 메모 연결망, 옵시디언에서 시도하던 플러그인 조합... 모두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합니다. 마치 나무를 심었다가 뿌리 내리기 전에 뽑아서 다른 곳에 옮기는 것과 같습니다. 한 도구를 오래 쓰면서 얻을 수 있는 누적의 효과를 누리지 못한 채, 계속 초보자 상태로 돌아가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Evidence: 이론이 최우선일 때 좌절 확률이 높습니다
제가 만든 영구메모 중 하나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이론이 최우선의 추구 대상일 때, 삶은 이론의 이상향과 현실의 갭으로 인해 좌절될 확률이 높다."
출처: [[이론은 실제 실행을 돕는 보조제일 뿐이며 자체로 성장을 보장하지 않는다]]
만약 제가 처음이었다면 이 함정에 빠졌을 것입니다.
제텔카스텐 이론은 완벽한 지식관리 시스템을 약속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정리되지 않은 메모가 쌓이고, 연결은 억지스럽고, 도구만 계속 바뀝니다. 이론과 현실 사이의 간극. 그 좌절감이 많은 사람들을 멈춰 세웁니다.
이론과 실천 사이의 간극은 지식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비앙카 보스커(Bianca Bosker)는 예술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은 저널리스트였습니다. 책으로 예술 이론을 공부했지만, 미술관에 가도 작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5년간 뉴욕 미술계에 직접 뛰어들었습니다. 갤러리 조수로 일하고, 작가 스튜디오를 도왔습니다. 미술관 보안요원으로 근무하며 관람객들이 작품을 어떻게 보는지 관찰했습니다.
그제서야 "예술을 보는 법"을 체득했습니다. 책 [[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술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은 작품 앞에 이미 있다고. 이론이 아니라 경험이 이해를 완성했습니다.
개인지식관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제텔카스텐, 옵시디언, PARA를 안다고 해서 자동으로 실천되지 않습니다. 직접 메모를 쓰고, 연결을 시도하고, 실패를 겪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연결이 왜 중요한지 체득됩니다.
또 다른 영구메모는 이렇게 말합니다:
"과도한 제약은 새로운 가능성과 재미를 반감시킨다."
출처: [[복잡한 프로세스는 개인의 자유도와 만족도를 떨어뜨린다]]
맞습니다. 만약 제가 처음이었다면 완벽한 제텔카스텐 시스템을 만들겠다는 집착에 사로잡혀, 정작 메모 쓰는 재미를 잃어버렸을 겁니다. 임시메모는 반드시 24시간 내에 처리해야 하고, 영구메모는 반드시 원자적이어야 하고, 연결은 반드시 의미가 있어야 한다... 이런 규칙들이 오히려 실천을 가로막습니다.
이론이 성장을 돕는 게 아니라, 제약하고 있었던 겁니다.
Reflection: 이론 함정의 본질
지금 돌아보면 이런 깨달음이 있습니다.
PKM 이론 = 출발점, not 도착점
제텔카스텐 방식은 이렇게 하면 좋다는 제안이지,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는 명령이 아닙니다. PARA는 이렇게 분류하면 편하다는 힌트이지, 이 외의 방식은 틀렸다는 법칙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론을 지침이 아닌 규칙으로 받아들입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진짜 문제: "내 삶의 맥락에서 실천"
제텔카스텐은 니클라스 루만의 맥락에서 완벽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루만이 아닙니다. 매일 회의가 있고, 갑작스러운 업무가 쏟아지고, 저녁에는 가족과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루만의 이론을 우리 맥락에 맞게 조정하지 않으면, 이론은 그저 이상적인 공허함일 뿐입니다.
"안다"와 "실천한다"는 다릅니다
제텔카스텐을 안다고 해서 자동으로 실천되는 게 아닙니다. 연결의 중요성을 안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연결이 보이는 게 아닙니다. 이론은 지도입니다. 하지만 지도를 외운다고 목적지에 도착하는 게 아닙니다. 직접 걸어야 합니다. 시행착오를 겪어야 합니다. 우리 발로 길을 만들어야 합니다.
도구보다 원리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도구만 계속 바꾸면, 결국 어떤 도구도 제대로 활용할 수 없게 됩니다. 옵시디언이 좋다고 해서 옮겼지만, 정작 왜 연결이 중요한지 모르면 옵시디언의 백링크 기능도 무용지물입니다. 노션의 데이터베이스가 강력하다고 해도, 어떻게 분류할지 원칙이 없으면 결국 복잡한 구조만 만들어집니다.
한 도구를 오래 쓰면서 얻는 것은 단순한 기능 숙달이 아닙니다. 시간이 쌓이면 나만의 검색 패턴이 생깁니다. 메모 네트워크가 두터워집니다. 어떤 플러그인 조합이 내게 맞는지 체득됩니다. 이런 누적의 힘은 도구를 바꾸는 순간 사라집니다.
도구는 원리를 실현하는 수단입니다. 원리를 먼저 이해하면, 어떤 도구를 쓰든 본질은 유지됩니다. 그리고 한 도구에 정착해서 오래 사용하면, 그 도구를 통해 원리가 더 깊이 체득됩니다.
이것이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개인지식관리의 핵심입니다. 도구가 바뀌어도 무너지지 않는 시스템, 3개월 뒤에도, 1년 뒤에도 10년 뒤에도 작동하는 워크플로우. 그 안정성은 원리에서 나옵니다.
그제서야 이론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Bridge to Next Week: 저항을 줄이는 실험들
이론의 함정을 깨닫고 나면,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내 워크플로우에서 저항을 느끼는 지점은 어디인가?"
- 정리할 메모가 너무 많아서 버겁다? 그럼 AI 활용이나 자동화를 시도해볼 수 있습니다.
- 연결이 억지스럽게 느껴진다? 그럼 연결을 "찾는" 게 아니라 "만드는" 방식으로 바꿔볼 수 있습니다.
- 도구가 자꾸 바뀐다? 그럼 한 가지 도구에 집중해볼 수 있습니다.
저항을 줄이는 실험, 그게 우리를 다시 메모하고 움직이게 합니다.
다음 주에는 "내 개인지식관리 워크플로우의 저항 지점"을 찾고 줄여나가는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도구가 전부는 아닙니다. 진짜 중요한 건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는 일"입니다. 이론에서 실천으로 넘어가는 여정, 함께 걸어보시겠어요?
생산적생산자 드림